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문령 전투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이 전투로 인해 무주군은 요동 지방에서 물러나야 했다. 이에 무주 조정은 직접 중앙군을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이들이 물러난 후 거란과 해가 [[돌궐]]에 복속되면서 무주가 대조영 집단을 공격할 수 있는 길이 틀어 막히게 된다.[* 또한 당시의 무주는 [[가르친링]]이 이끄는 [[토번]]의 압박을 꾸준히 받고 있었고 바로 2년 전에는 거란의 [[이진충]]이 영주(營州)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, 천문령 전투가 벌어지던 697년에는 [[묵철가한]]이 무주의 요청으로 이진충을 박살냈지만 되려 영주와 승주(勝州=내몽골 일대)를 노략질했다가 평적군부사(平狄軍副使)로 임명된 안도매(安道買)가 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물러났을 정도로 상황이 막장이었다. 무주로서는 눈에 거슬리는 대조영 집단을 대군을 내어 잡고 싶어도 그럴 요건이 안되었던 것.] 그 사이에 대조영은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여 계루부의 옛 땅을 차지하고 오늘날의 [[길림성]] 돈화시에 있는 동모산에 성을 축성하고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하나 둘 말갈인들과 고구려인들이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. 이를 발판으로 697년 세력을 다시 키운 대조영은 동모산을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'''진국'''[* 아이러니하게도 걸걸중상이 받지 못한 진국공의 '진국'이라는 명칭이 훗날 대조영이 건국했을 때 첫 국호로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. 다만 [[구당서]]와 [[신당서]]의 한자표기가 서로 다른데, 구당서는 '振國', 신당서는 '震國'이다.]이라 했다. 이 진국이 훗날 '''[[발해]]'''가 된다. 대조영 집단이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군을 격파함으로써 동만주에 있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이 강대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. 아울러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대조영 집단을 중심으로 많은 고구려 유민이 결속되었으며 발해 건국의 초석이 마련되었다. 한편 거란 출신 당나라 무장인 [[이해고]]는 이 일로 숙청당하지 않고 [[700년]]에 같은 출신인 낙무정과 함께 거란족 잔당을 토벌했다. 이 공으로 좌옥검위대장군, 연국공에 임명되고 무씨 성까지 하사받았으나 측천무후의 권세가 약해진 후 다시 이씨 성으로 환원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